BITCH RUNWAY

비 혼 하 다 (feat.독 립 하 다) 본문

개별게시판/단칼

비 혼 하 다 (feat.독 립 하 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8. 30. 17:36

 

 

20대의 어느날, 나는 문득 비혼을 결심했다.

그러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의 비혼 결심의 수준은 단순히 "결혼하지 않겠다"가 아니었다.

미혼의 청년이 그냥 단순하게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지금의 삶의 유지하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에 불과하지만, 내 결심은 그 차원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진정한 나 자신의 삶을 세우는, 사회적으로 '결혼'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사회적인 지위를 결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획득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파트너 없이.

이를테면 나는 '비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결혼하다'라는 동사가 있으니까, 이왕이면 '비혼하다'라는 동사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음을 결심한 나는 이제 홀로 부모로부터 독립해야만 했다. 여차하면 비혼식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정신적으로만 독립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도 판단했다.

내가 아무리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생활적으로 독립적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관성'이란 것은 환경이 변화하지 않으면 쉽게 깨지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나를 돌봐주는 관성, 내가 부모님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존하는 관성은, 내가 독립하지 않은 한 변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물리적으로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나는 20대 후반이 다 되어가도록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장이동으로 서울에 이사온 후, 내 식구들은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보통 내 주변의 또래 친구들은 스무살이 될 무렵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부모와 독립했지만,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하물며 서울 안에서라도 아주 먼 곳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취직했으면 모를까,

나는 하필이면 집에서 아주 가까운 대학을 다녔고, 집에서 아주 가까운 회사에 취직했다.

 

야망이 넘치는 대한민국 청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서울에 있는데, 하필 나의 부모님도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서울을 떠날 필요가 없고 부모님을 떠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2016년의 20대가 흔히 그러하듯 나 또한 커리어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한답시고 돈을 많이 써서 경제적으로는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독립 의지만으로 독립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제적으로는, 내가 계속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편이 압도적으로 이득이니까.

그리고 서울의 집값은, 금수저가 아닌 청년이 의지만으로 독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방 출신 친구들이 나(=서울 출신)의 혜택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들은, 정말로 상당한 혜택었던 탓에 단순히 어른이 되겠답시고 그 달콤한 어드벤티지들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경상도 출신의 아주 보수적인 나의 부모님은, 단순히 독립을 하고싶다는 이유로 나의 독립을 '허락'하거나 '인정' 하실 리는 없었다.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어디 감히 혼자 집을 나가? 조신하지 못하게!'

(정말로 이런 말을 들었다... 젊은 여자의 독립=남자불러들임=순결잃음=결혼못함=집안망신 으로 연결되는 그 희안한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번 글을 써보고 싶을 정도다.)

 

정말이지 결혼이 아니면 독립을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내 친구들 중 일부도 결혼을 통해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많은 청년들은, 부모가 허락하거나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하지 않는 한, 결혼을 통해서 독립한다.

결혼은 부모의 돈으로 집을 사거나 독립의 변을 마련할 좋은 기회니까.

 

하지만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건데?

 

그렇다면 어떻게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비혼해서 단독 세대주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단순히 독립하기 위해서, 적절한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 유학만 3년을 준비했을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유학길은 쉽지 않았고 나는 차선책을 통해서 간신히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방출신 친구들은 나이가 차면 일을 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서울에 간다.

나는 그 반대로 했다.

지방의 회사에 취직해서, 생각보다 당당하게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사실 이직 과정에서는 운이 상당히 좋았다.)

 

'뭐? 지방으로 취직...? 그래도 회사가 좋으니까.'

 

나의 부모님은 조신하게 키워야 할 딸을 홀로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보수적인 부모님이 너무나 좋아하실만한 회사에 취직해 버린 것이다.

내 부모님은 차마 나보고 그 회사 가지 말라고 하실 수 없을 만큼 (부모님에게)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는 서울 지사 같은 건 없니? 아니면 서울로 이전할 계획은 없대?'

 

부모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내가 입사하기 전, 고역 끝에 지방으로 막 이전한 나의 회사는, 향후 20년간은 다시 서울로 이전할 일도 없으며, 업무 특성 상 종종 출장은 있을 지언정 서울 지사같은 것도 없을 곳이었다.

별일 없으면 나는 이제 지방에서 정년까지 보내야 한다.

오히려 상경 20년 동안 서울에 완전히 터를 잡으신 지방 출신의 나의 부모님이야말로 퇴직한 후에도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

 

나름대로는 완전한 독립의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엔 내 부모님은 내가 평일에만 지방의 자취방에서 잠을 자고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내가 주말에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을 때, 부모님이 내 생각보다 많이 놀라셨다.

 

'오늘(금요일)은 언제 집에 오니?'

'이번 주는 서울에 안 가요.'

'왜?'

'제가 왜 매주 가야 하는데요?'

 

???!!!!!

 

사실 나는 딱히 살갑지는 않아도 부모님과 사이가 그럭저럭 좋은 편이다.

나 역시 지방으로 이사한 후에, 부모님을 보고 싶을 때도 있었고, 종종 본가에서 키우는 개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주말마다 내 집을 떠나면 나는 내 취미생활을 할 여유도, 집을 청소하거나 새로운 지방의 도시에 적응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일부러라도 내 삶의 중심 축 자체를 서울이 아닌 새로 살게 된 도시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서울에 너무 자주 가지 않아야 했다.

 

이동하는 측면 뿐만 아니라 물건의 측면에서도 나는 삶의 축을 옮기려고 애를 많이 썼다.

 

입사한 후로도 한달 간은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 집으로 내 모든 짐들을 하나 둘 씩 옮겼다. 

나는 비혼을 결심하고 독립을 한 것이니, 남들이 신혼살림 차릴 때처럼 나도 내 자취 살림을 거창하게 차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부모님 집에 있는 나의 짐들은 거의 전부 다 가지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걸 본 부모님은 또 어리둥절해 하셨다.

어차피 회사 근처 자취방은 평일에 잠만 자는 곳 아니냐고. 왜 짐을 죄다 거기다 갖다 놓냐고.

내 짐을 내 집에 갖다 놓는게 왜 문제냐고 되물었더니 부모님은 또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셨다.

 

 

 

써놓고 나니 내가 상당히 매정하게(?) 독립한 것처럼 보이는데, 만일 내가 결혼을 해서 신혼살림을 따로 차렸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서 자고 짐도 다 친정 집에 맡겨 두는 게 정상인지, 아니면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가려고 노력하는게 정상인지.

나는 남들이 결혼하는 것처럼 '비혼했' 으니 결혼한 사람처럼 내 가정 (단독 가구지만)을 꾸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몇 달째 흘러가고 있다.

부모님과의 전화통화 횟수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삶의 매일매일은 연속적이지만 지나고나면 변화를 느끼는 것처럼, 독립 역시 하루아침에 뙇!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리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먹고 있다. 나의 비혼과정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나는 내 비혼 생활(?)이 시작될 무렵에 비혼을 위한 팀블로그가 시작된 것은 공교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 글을, 그래서 비혼 생활의 오프닝으로 시작해보았다.

앞으로 혼자 살아가는 것,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팀블로그 작업을 통해서 생각해볼 예정이다.

과연 앞으로도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ㅋㅋㅋㅋ

 

 

 

 

'개별게시판 > 단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혼과 외로움  (2) 2016.09.12